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인내상자’는 200페이지 남짓인데
이야기는 8가지나 있다. 야호!
대망의 스타트 ‘인내상자’를 읽으면서
칸트를 연구해 오신 백종현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진짜 좋아하는 친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지 귀 기울여 듣듯이
이렇게 중언부언 말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상황과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공들이 듯 노력해 달라.’
이렇게나 호소할 정도로 칸트의 글은 어렵지만...
미미여사님 당신의 글이 어려울 필요는 없잖아요..
극 중 ‘인내상자’는 결코 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내 뚜껑은 여러 번 벌컥 열렸다.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결말이라니.....
게다가 작중의 여성 이름이 죄다 ‘오~’로 시작하는 점도
뚜껑 열리게 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에도시대에 여성 이름에 대한 정보를 찾으니 나무위키와 블로그에서
에도시대의 여성이름 ‘오~’는 이름이 아니라
공경을 담은 존칭 같은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가락국수집 막내딸 아유미짱이 이웃에 시집을 가면 오유미상이 되는 식이란다.
아무튼 이름보다는 대화의 분위기, 어투로 충분히 인물을 가려낼 수 있으니
인내심을 길러보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남은 이야기 더 없나?’
뒤적거릴 정도였으니 무척 재밌는 책임은 보장한다.
8가지의 단편
- 인내상자
- 유괴
- 도피
- 십육야 해골
- 무덤까지
- 음모
- 저울
- 스나무라 간척지
이 이야기들 모두를 ‘한 가지 주제’가 관통한다.
그것은 ‘ 말할 수 없는 비밀 ’
아무런 해명 없이 닫혀버린 ‘인내상자’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득 담겨 있어 입을 꾹 닫고 끝났던 것이다.....
상자 주제에 의리가 있다.
처음 읽고 인내상자가 허무하게 닫혔을 때는 어이가 없어 때려치울까도 싶었으나
친애하는 미미여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갸웃갸웃 귀 기울여가며 읽어가 보니
‘인내상자’를 대대로 모셔온 오미야家 사람들은 볼 수 없던
상자 속 내용물을 독자들에게 살포시 공개하느라
제일 앞자리에 배치했구나 이해가 되었다.
(1) 인내상자
‘인내상자’는 과자점 오미야의 가보로 시커멓게 옻칠을 한 문서궤이다.
목숨을 잃을 정도의 큰 화재에서도 챙겨 들고 나올 때 두 팔로 꼭 감싸 안았다고 하니
우리 집 프린터기 만하려나?
‘가보’이긴 하지만 절대 열어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내주는 오슈(하녀)의 말들이
격분한 상태에서 와르르 쏟아지자
그 말들은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독자의 밍밍한 삶과는 완전히 비껴간 믿기 힘든 패륜의 아침드라마.
치정 살인의 증거처럼 남은 어린 딸에 감정이입되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낼 수 없던 비밀을 직감한다.
상황을 제대로 읽거나 크로스체크 할 필요도 없이
직감은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저주 아래서 사라진다.
강력한 스포는 긁어서 보시라 (모바일 환경은 다를 수 있다)
>>나(=어린 딸)는 어쩌면 아버지의 동생인 게 아닐까.
(5) 무덤까지
무덤까지 뭘 어째야 할는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여느 물자가 부족했던 지구상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대대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죽도록 일해도 소용없는 가난,
인간의 존엄 따위가 가난 앞에 우선순위일 수 없던 시대,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다.
파수꾼으로 근무한 이치베이는 근무 중 발견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었다.
이치베이 부부는 ‘자식이 없는 우리를 위해 부처님이 보내주신 아이들’이라며 극진히 키웠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세 명으로, 시집간 큰 딸 오노부(22세-미아출신),
술도매상 밑에서 출세한 아들 도타로(21살-고아출신),
도타로의 여동생 오유키(18살)이다.
막내 오유키만 아직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고 언니와 오빠는 독립을 했다.
독립을 했어도 교류가 왕성한 화목한 가정이다.
오유키에게 어느 날 친엄마가 찾아와 같이 살자고 권유하게 되면서
의붓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이 생기고
언니와 오빠에게 이 일을 상담하면서 각자의 비밀들이 연쇄적으로 소개된다.
오빠인 도타로는 동생이 상처받을까 봐 말하지 않는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10년 전, 유곽 여인의 차림으로 나타나 절연을 선언하고 돌아서던 모습이 선한데,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 괘씸하다,
친부모를 기다려 온 동생이 가엾어 그 여자가 진짜로 우리를 버렸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고자 한다.
여기까지는 순한 맛이다.
큰 딸 오노부는 동생의 비밀을 상담해 주고는 두 동생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의붓 부모가 형제들로 참 잘 키웠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오노부의 친부모는 자식들을 앵벌이 삼아 돈벌이를 해왔었다.
어린 오노부가 미아인 체하며 헤매면 동정과 연민을 보이는 가정을 파고 들어가
금품을 훔치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어찌 되었든 친부모를 거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마련이지만
오노부는 이른 나이에 그 친부모에게서 도망치고
이치베이 내외와 함께 살 결심을 한다.
미필적 고의였다.
착한 사마리아법과 비슷한 얼굴이지만 적극적인 목적성을 띄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망갔다.
한편 이치베에는 오유키의 변화를 눈치챘다.
이치베에는 착잡한 심경으로 남의 자식을 극진히 키우게 된 사건을 떠올린다.
속죄...
6번째 단편 ‘음모’에서 오카스의 독백이 이런 다양한 인생의 짐을 한줄평 한다.
“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우리는 자라면서 살아가면서
흑역사 한 두 개쯤은 거하게 양산하게 마련이다.
8가지 이야기 중 절반은 불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물자의 풍요와는 상관없이
짐승함유량이 1프로 정도 높은 사람들과 섞여왔을 것이다.
인간은 본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선을 행하고 법률을 만들어 왔고
그것을 지켜내며 존엄한 모습으로 인의예지신을 쌓아온 것임을 알아야겠다.
요즘은 법률도 자율도 없이 떼쓰고 발악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살아가는 데에는 온갖 이야기가 있고, 온갖 사랑이 있기도 하며
온갖 다양한 얼굴들이 있다고 현대인들에게 말하는 시대물,
항상 재미있게 보고 있는 미미여사의 작품.
이번엔 개그를 쏙 빼셨지만... 역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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