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교보문고 근처의 회사를 다니면서
매일매일 신간도서를 보러 갔다.
오랜만에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볼까 하고
가벼운 맘에 들었다.
그래고 뜻밖의 12년 전 감상노트가 적힌
포스트잇을 발견한다.
화가 많이 났는지
작가를 운명론자라고 신랄하게 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니 그때의 기분도 살아난다.
자유의지=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
이보다 더 나일 수가 없는데
그게 내가 아닌 데다, 자유도 없는 상태라니까
화가 많이 났었나 보다.
지금은 자유의지, 그 무의식적인 취향에 '자유'도 '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샘해리스(저자)의 영향 때문은 아니고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 강의를 통해
willing과 unwilling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김주환 교수의 친절한 강의를 추천한다.
친절함이 학업성취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유튜브로 해주는 비대면 강의이지만
놀라움의 길이 열리니 한 번쯤 보셔라.
샘해리스의 글은 너무 군더더기가 없어서
나에게는 좀 어렵고
뇌의 수준 운운할 때는 찔려서 불쾌하다.
어쨌든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 중
와닿은 것을 적어보자면.
'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을 할 '자유'가 있는가?
굳이 이해해 보자면 알고 있어야 비로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왜 선택했는지
핑계를 대거나, 변명을 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실제로 왜 선택했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매 순간 치열하게 그리 될 뿐이지
매 번 내가 숙고한 후 선택하지만은 않는다.
나를 작동하게끔 한 원리
배경에 의한 것 즉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일에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까?
내게 뇌종양이나, 치매와 같은 (우리나라는 알코올까지)
비정상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는 병명이 발견되지 않는 한
나의 악의적인 경향에 대해
사회적인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매 순간 의식적 주체로서 살아가기는 불가능하지만
최대한 매 순간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다.)
지금까지 들어 본, 가장 어이없는 변명!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한심해 보일 변명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일 것 같아서
나는 항상 보복하고 싶은 마음의 뿌리를 찾고 싶었다.
책에서는 보복하고 싶은 충동을
'인간 행위의 바탕에 깔린 원인들을 보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는 것'
이라고 한다.
보복심에 휩싸였을 때 남의 사정을 봐주기란 여간 쉽지 않다.
어쩌면 내가 극복해야 할 마지막 산이라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기어코 풀고 싶은 기분에 휩싸이고 만다.
나쁜 유전자, 나쁜 부모, 나쁜 환경, 나쁜 생각 등이 일정하게 결합된 사람들이다.(p68)
그래! 전적으로 그 작자들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샘해리스가 공부 많이 한 거랑
'자유의지'를 잘 가르쳐주는 거랑은 별개이듯이...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의지는
willing보다 UNwilling을 실천할 때 더 발전적인 나를 완성할 수 있다.
추상을 단어로 정리한 것은 굉장한 일이지만
샘 해리스의 문체는 친절하지 않고,
개념을 처음 듣는 분들은 불쾌하실 수도 있다.
(룰루 밀러의 아버지가 이랬을까?)
다시 봐도 어렵고 씁쓸한 자유의지는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 강의를 통하면 기분 좋게 배울 수 있다.
유튜브에서 관련강의 들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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